[The Core]_제 3 화 『 집단감염 』_32. 시장
32. 시장

시장 빅터는 골든 타워 중심에 솟은 최고층 빌딩, 「올림푸스 시티」의 최상층에 있었다. 사방이 유리로 된 집무실에서 화려하게 빛나는 도시를 내려다보는 그는 깊은 만족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이 골든 타워를 만든 장본인이자, 한낱 항구도시에 불과하던 이곳을 화려한 향락의 도시로 바꿔놓은 선구자였다. 사람들은 골든 타워를 사랑했고, 빅터를 존경했다. 적어도 골든 타워 안에서만큼은 그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쥐고 있었고, 그 자신도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날도 그는 그런 힘을 이용해 집무실에서 스물세 번째 여비서를 희롱하고 있었다.
똑똑.
“아, 잠시.”
집무실 밖에는 짙은 갈색 수트를 입은 늙은 남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 남지 않은 머리카락을 뒤로 빗어 넘긴 탓에 이마가 훤히 드러났고, 그 위엔 굵은 주름이 깊게 패여 있었다. 누가 봐도 복 없는 상이었다.
“들어오지!”
남자가 문을 열자 얼굴이 앳된 여자가 상기된 얼굴로 남은 단추를 황급히 잠그며 방 밖으로 빠져나갔다. 남자는 멀어져 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음흉한 눈빛으로 훑으며 실실 웃다가, 이내 보스가 있는 방 안으로 들어가 비굴한 태도를 취했다.
“드미트리! 나의 친구!”
빅터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거대한 두 팔로 남자의 양팔을 힘껏 쳤다. 서로가 썩을 대로 썩은 미치광이 놀이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그는 드미트리와 있을 때면 마치 전장을 함께 누빈 전우라도 되는 듯 끈끈한 유대감을 느끼곤 했다. 빅터는 종종 고대 서사시의 어투를 흉내 내며 장난을 쳤고, 드미트리 역시 그 말장난을 능숙하게 받아 넘겼다.
“잘 왔네. 이리 와 앉게나!”
빅터는 자신의 수행비서 드미트리를 푹신한 검은 소파에 앉혔다. 쿠션이 지나치게 푹신했던 탓인지, 드미트리가 앉자마자 몸이 소파 속으로 푹 꺼져버렸다. 빅터는 둥근 유리병에 담긴 브랜디를 가져와 탁자 위 유리잔 두 개에 가득 따랐다.
“드미트리! 멀리 지중해에서 삼단선을 타고 나타나 트로이아 군의 용맹을 노래하러 온 나의 호메로스여! 자네가 들려줄 대서사시가 내게 주는 기쁨이란, 카이사르가 로마 군단에 안겨준 황금빛보다 찬란하고, 베르길리우스가 저승으로 향하던 오디세우스의 발걸음을 되돌릴 만큼 강렬하다네! 자, 이제 그 기쁨을 위해, 날카로운 창에 꿰뚫린 채 거대한 물푸레나무에 묶여 아홉 밤을 견딘 이 몸에게, 사막의 정오에 찾아오는 샘물 같은 소식을 들려주게.”
빅터는 컵 가득 따른 브랜디를 드미트리에게 건넸다. 드미트리가 잔을 받자 그는 곧바로 잔을 부딪히고는 목이 타들어 갈 만큼 독한 술을 한 번에 들이켰다. 드미트리 역시 따라 마셨고, 그 독함에 얼굴이 금세 벌겋게 달아올랐다가 이내 긴장이 풀린 표정이 되었다.
“시장님께선 뵐 때마다 점점 더 젊음과 혈기가 넘치시는 것 같습니다. 이를테면 아름다운 페니키아 공주를 차지하려고 번개처럼 천지를 뒤흔들며 달려드는 황소와도 같군요. 옛날 북해를 가로질러 새로운 약탈지를 찾아 헤매던 스칸디나비아의 야만 왕이 나타나 열정을 논한다 해도, 쉽사리 승부가 나지 않을 겁니다.”
빅터는 드미트리의 사탕발림에 기분이 좋아져 천장이 떠나갈 듯 호탕하게 웃었다. 드미트리는 언제나 넓고 얄팍한 지식으로 빅터의 가려운 곳을 정확히 긁어주었다. 허영심으로 가득한 코드가 묘하게 맞아떨어져서인지, 이런 면에 있어서는 누구도 그를 따라오지 못했다. 평소 빅터는 드미트리를 두고 ‘뱀의 머리를 한 마녀’라 평했는데, 그것은 진심 어린 혐오라기보다는 자신만큼은 아니더라도 그에 걸맞은 수사로 내릴 수 있는 최대의 찬사였다.
“지난번에 지시하셨던 일은, 교활한 헤라클레스의 아내가 남편의 옷에 독을 바르듯 아무도 모르게 깔끔히 처리되었습니다. 그 독이 삽시간에 퍼져 살을 뜯고 고통에 몸부림치게 하듯, 시장님을 괴롭히던 족속들은 모두 괴물로 변해 헌터들의 총에 무자비하게 학살당하고 있지요. 뿐만 아니라 ‘그 일’과 관련된 자들은 우리 자치군이 현장에서 모두 사살했고, CCTV를 비롯한 기록물도 즉시 회수해 파기했습니다. 이로써 시장님의 앞을 가로막던 장애물은 거의 제거되었다고 보셔도 될 것입니다. 다만…”
“다만?”
“시신 수를 맞춰 보니 꼭 한 명이 비었습니다. 시체를 찾지 못한 것일 수도 있고, 어딘가 떠내려간 것일 수도 있습니다만…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분명 우리 자치군이 전원 사살을 확인했고….”
“그만!”
빅터는 손에 들고 있던 유리잔을 테이블에 내리꽂으며 드미트리의 말을 끊었다. 드미트리는 그의 돌발 행동에 겁을 먹고 덜덜 떨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목숨까지 내어줄 듯 인자하던 얼굴은 온데간데없었다. 빅터의 낯은 시뻘겋게 달아올랐고, 핏줄이 도드라진 채 악마처럼 일그러져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 한 명을 놓쳤다는 말을 하고 있는 건가?”
빅터가 눈을 부릅뜨며 다그쳤다. 드미트리는 어쩔 줄 몰랐다. 빅터는 평소엔 대인배인 척 사람을 대했지만, 그가 싫어하는 임계점을 건드리면 이성을 잃고 분노에 잠식되어 극단으로 치닫는 경우가 있었다. 손에 잡히는 물건으로 상대의 머리를 내리쳐 으깨버리거나, 멱살을 잡아 번쩍 들어 창문 밖으로 던져버리는 식이었다. 드미트리는 즉시 소파에서 내려와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살려주십시오. 반드시 찾아내겠습니다.”
드미트리의 빠른 태도 전환 덕분인지, 빅터는 다시 조금씩 이성을 되찾는 듯 거친 숨을 몰아쉬며 눈동자를 굴렸다. 이내 그는 조용히 일어나 책상 서랍으로 가더니 황금 장식이 박힌 권총을 꺼내 들고 드미트리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일어나.”
목소리는 오히려 차분했다. 드미트리는 몸을 일으켰지만 감히 빅터의 얼굴을 똑바로 보지 못한 채 얼어붙어 있었다. 빅터는 제 허리 높이쯤 되는 드미트리의 작은 머리를, 농구선수가 한 손으로 공을 잡듯 왼손으로 움켜쥐고 말했다.
“이봐, 드미트리. 나에게 구원을 바라는 건가?”
“살려주십시오.”
빅터는 드미트리의 머리를 쓰다듬듯 문지르며 말을 이었다.
“자네 머리는 동글동글한 것이 참 잘 익었군. 이 무쇠보다 단단한 티타늄 탄환이 자네 해골을 뚫고 들어가면 골수가 사방으로 시원하게 튀겠어. 그렇지?”
드미트리는 오른쪽 관자놀이에 닿은 차가운 총구의 감촉을 느꼈다. 그는 눈을 질끈 감고 연신 살려달라고 빌었다. 빅터는 유리벽 너머로 펼쳐진 화려한 도시를 바라보며 말했다.
“자네도 잘 알지 않나? 내가 여기까지 어떻게 올라왔는지. 잘한 것엔 상을 주고, 잘못한 것엔 벌을 내린다. 그 단순한 원칙을 나는 한 번도 어긴 적이 없어. 그래서 사람들이 나, 빅터를 존경하는 거지.”
그는 유리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다시 바라보았다. 무자비한 자신의 얼굴에서 그는 권력자가 도달할 수 있는 최종 형태를 보았다. 그리고 그 모습에 깊이 만족했다. 빅터는 드미트리의 뒤를 감싸 안듯 다가가 그의 왼손을 붙잡고, 그 손안에 자신의 권총을 쥐여주었다. 그리고 귀에 대고 낮게 속삭였다.
“녀석을 잡아와. 이 총으로 직접. 그러면 아까 그 비서를 네게 주지. 이 정도면 꽤 자비로운 편 아닌가?”
빅터는 조용히 책상으로 돌아가 자리에 앉았다. 드미트리는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해결하고 오겠다며 연신 허리를 굽혀 읊조리더니, 집무실 밖으로 도망치듯 빠져나갔다. 빅터는 유리창에 반사된 그의 뒷모습을 한 번 바라본 뒤, 다시 도시의 화려한 불빛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
“본부. 여기는 B조. 목표물 회수 완료. 복귀하겠다. 이상.”
자치군으로 보이는 남자가 ‘관제실’ 안에서 검은 가방에 네모난 기기를 집어넣었다. 그가 가방을 닫고 밖으로 나오자, 문 앞에는 비슷한 무장을 한 남자 둘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밤 8시를 넘긴 시각, 앞도 잘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건물 안에서 비밀스러운 작업을 마치고 빠져나오는 사람들처럼, 그들은 걸음을 재촉했다. 복도를 가로질러 중앙 로비 쪽으로 향하던 중, 반대편에서 정적을 가르는 짧은 소리가 들렸다. 한 남자가 랜턴으로 소리가 난 곳을 비췄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으스스하구만. 이러다 광인이라도 튀어나오는 거 아닌가?”
“이봐, 무서운 소리 하지 마. 바지에 오줌 싸겠네.”
“이미 헌터들이 한 번 훑고 간 곳인데 설마 광인이 남아 있겠어?”
셋은 대화를 이어가며 공포를 떨쳐내려 했다. 하지만 가동이 멈춘 지 오래되어 거의 폐건물이나 다름없는 정수장에 셋만 남아 있다는 사실 자체가 오싹했다.
“잠시만, 저기 뭔가 있는 것 같은데?”
한 남자가 상층 계단 쪽을 향해 랜턴을 이리저리 비췄다. 순간 눈앞으로 검은 물체 하나가 재빨리 스쳐 지나갔다.
“으악!”
남자는 비명을 지르며 뒤로 넘어졌다. 뒤에 있던 두 사람이 급히 달려가 그가 본 방향을 비췄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이봐, 괜찮아?”
“뭘 본 거야?”
남자는 자신이 본 것이 너무 순식간이라, 혹시 착각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때였다. 셋의 등 뒤로 검은 천막 같은 것이 내려앉는 듯한 오싹한 기척이 스며들었다. 그들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으악”
“으악!”
“으악!!”
무장한 남자 셋이 등을 맞댄 채 기절해 있는 동안, 긴 코트를 입은 남자는 검은 가방에서 기기를 꺼내 자기 어깨 위에 둥둥 떠 있는 세텔라이트에 연결했다. 세텔라이트는 전방으로 초록색 빔을 쏘아 사각형 화면을 만들어냈다. 그는 화면 속 영상을 8배속으로 빠르게 돌리기 시작했다.
화면엔 커다란 통 여섯 개가 놓인 화학약품 처리장이 보였다. 깊은 밤이 되자 탱크로리 한 대가 들어왔고, 남자 셋이 나타나 탱크에 연결된 호스 세 개를 약품 탱크 입구에 꽂고 밸브를 열었다. 액체가 넘어가는지 호스가 꾸물꾸물 움직였다. 약 20분 뒤 그들이 호스를 거두는 순간, 갑자기 강한 조명이 그들을 비췄고 이어 총성이 터졌다. 남자 둘이 총에 맞은 듯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뒤이어 자치군으로 보이는 무장 병력들이 나타나 시체를 살피더니, 그것들을 치우고 탱크로리까지 몰고 사라져버렸다.
영상이 끝나자 남자는 파일을 복사한 뒤 수신자를 ‘정보보안센터장 코피’로 지정해 전송했다. 그리고 다시 기기를 검은 가방에 집어넣은 후, 기절한 남자들 곁에 조용히 내려놓고는 암흑 속으로 사라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