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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Core]_제 3 화 『 집단감염 』_41. 랄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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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랄프



남자는 꺼져가는 숯불 덩어리가 든 화로를 꼬챙이에 끼워 가게 밖으로 나갔다. 어두컴컴한 뒷골목엔 칼바람이 불어 화로의 온기가 유독 따뜻하게 느껴졌다. 그는 화로를 바닥에 두고 죽어가는 불꽃을 머금은 숯덩이를 하나씩 숯불 무덤으로 던졌다. 숯덩이가 하나씩 떨어져 부서질 때마다 잿가루가 날렸고, 빨간 불씨는 서서히 빛을 잃어갔다.



[스르륵]



남자의 뒤편에서 무엇인가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남자는 깜짝 놀라 뒤를 쳐다보았다. 그는 어둠 속에 숨어 있던 무언가가 자신을 덮칠까 봐 가슴이 콩닥거렸다. 하지만 쓸쓸한 뒷골목에는 허름한 외벽과 버려진 담배꽁초, 빈 깡통만 뒹굴 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애써 놀란 가슴을 추슬렀을 때, 갑자기 커다란 천이 그를 왈칵 감싸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얼른 고개를 돌렸다.



“으악!”



랄프는 그대로 기절했다. 쓰러진 그의 뒤로 원숭이 마스크를 쓴 사내가 서 있었다. 남자는 마스크를 벗고 기절한 랄프를 쳐다보며 미안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





랄프가 얼마 동안 잠들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그는 큰 담요에 덮인 채 한쪽 벽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웬 남자가 쭈그려 앉아 꼬챙이로 타오르는 화로 위의 숯불을 뒤적이고 있었다. 숯이 잘 타들어 가는 듯 타닥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누구…?”



랄프는 조심스레 물었다. 남자가 자신을 해치러 온 사람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경계심을 늦출 수 없었다. 긴 코트를 입은 남자는 숯불이 잘 타는 게 만족스러운 듯 두 손을 털고 일어나 랄프를 쳐다봤다. 남자의 얼굴은 하얗고 평범했다. 랄프가 경계심을 조금 풀고 재차 신원을 묻자, 남자는 주머니 속에서 은빛 리볼버 총을 꺼내 보여주었다. 랄프는 온몸에 찌릿한 전율을 느끼며,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표정을 지었다.



남자는 자신을 헌터라고 소개하며 그를 해칠 생각이 없으니 인상을 풀어달라고 말했다. 랄프가 자신에게 무슨 용무인지 묻자, 헌터는 랄프가 정수장에서 한 일에 대해 설명해 달라고 요구했다.



랄프는 속으로 크게 놀랐지만 애써 침착한 척하며 무슨 소리냐고 반박했다. 그러자 헌터는 자신의 새틀라이트에 손짓했고, 동그란 구체 로봇이 빔을 발사하자 네모난 CCTV 영상 속에 랄프의 모습이 선명하게 나타났다.



랄프는 자신은 시킨 대로 했을 뿐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발뺌했다. 헌터가 누가 시켰는지 캐물었으나, 랄프는 헌터가 자신을 죽이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들자 말하기를 거부하고 가게 안으로 도망치려 했다.



그러자 헌터는 다른 화면을 띄웠다. 화면에는 랄프의 유일한 가족인 여동생이 집에서 남편과 함께 아이들을 돌보고 있는 단란한 장면이 비치고 있었다. 랄프는 순간 욱하는 심정에 화가 치밀어 헌터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이내 그의 이마에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전해졌다.



헌터의 눈은 죽은 듯 차가웠다. 랄프가 흠칫하며 뒤로 물러나자 헌터는 총을 거두어 주머니에 넣었다. 랄프는 잠시 고뇌하더니 깊은 한숨을 쉬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재작년 가을쯤이었을 겁니다. 화물차를 모는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었죠. 자기가 이번에 큰일을 하나 맡았는데 도와줄 수 없겠냐고 묻더군요. 저도 그땐 쉬고 있던 터라 하겠다고 했죠. 친구와 같이 도시 외곽에 있는 폐차장으로 갔는데, 저 말고도 몇 명이 더 대기하고 있더군요. 그때 사무실에서 남자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는데, 그중 한 명이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이었어요. 골든타워의 비서실장, 드미트리더군요. 그는 우릴 힐끔 쳐다보더니 도망치듯 차를 타고 곧장 가버렸습니다.”



랄프는 담배를 한 대 입에 물고는 불을 붙였다.



“일은 꽤 단순했습니다. 각 군에 있는 정수장에 약품 살포만 하면 된다더군요. 한 가지 이상한 건 살포 작업을 야밤에 한다는 거였습니다. 정수장 약품 살포를 민간인에게 맡기는 것도 수상한데 굳이 왜 밤에 하나 싶었죠. 고용주 말로는 최근에 살균용 이산화염소를 싣고 오던 배가 전복돼버려서, 정수장에 약품 재고가 매우 부족한 상태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농도를 최대한 낮춰 살포를 했는데 그게 환경부에 제보가 들어갔던 모양이죠. 다음 날 환경부에서 감사가 올 예정인데, 그전까지 어떻게든 살포를 마무리하겠다는 명분이었습니다.”



랄프는 깊게 연기를 빨아들였다가 내뱉었다.



“뭐, 이유야 어찌 됐건 저희 입장에선 나쁠 게 없었습니다. 하루 일당 치고 페이가 꽤 쏠쏠했거든요. 저녁 8시쯤 돼서 봉고차를 타고 도시 외곽에 있는 어떤 화학 공장으로 갔습니다. 거대한 셔터문이 열리는데, 어마어마하게 큰 탱크로리 차들이 일렬로 세워져 있더군요. 그땐 좀 무서웠죠. 그렇게나 규모가 클 줄은 몰랐거든요. 그때 저희 말고도 다른 사람들이 봉고차를 타고 속속 도착했습니다. 저랑 제 친구, 그리고 다른 남자 셋이 한 차를 배정받았고 곧바로 8군 정수장으로 향했습니다.”



랄프는 다시 담배를 빨아들이다가, 무언가 불길한 기억이 떠오른 듯 얼굴을 찌푸렸다.



“정수장에 도착했는데 경비원도 없고 문도 활짝 열려있더군요. 느낌이 쎄하긴 했지만, 후딱 안으로 들어가 주차를 하고 호스를 연결해 약품 탱크를 열었습니다. 호스가 출렁거리면서 약품이 쏟아져 들어가는데 뭔가 냄새가 이상하더라고요. 염소 특유의 톡 쏘는 냄새가 안 나고, 뭐랄까… 지독한 석유 냄새 같은 게 났어요. 제가 전문가는 아니니 정확히는 몰라도, 본능적으로 썩 좋지 않은 기분이 들었죠.



그렇게 한참 약품을 주입하고 있는데, 정수장 입구로 웬 차 한 대가 들어오더군요. 저흰 깜짝 놀랐습니다. 그 야심한 시각에 저희 말고 다른 사람이 올 거란 소린 못 들었거든요. 멀뚱멀뚱 서서 그 차를 지켜보는데, 차가 저희를 향해 정면으로 라이트를 비췄어요. 눈이 부셔서 차 안의 사람들은 잘 안 보였고 곧 남자 여럿이 내렸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탕!’ 하는 파열음이 나더니 앞에서 저희랑 같이 온 남자가 고꾸라지는 겁니다.



솔직히 그 순간엔 머릿속이 하얘졌어요. 사람이 총에 맞는 걸 눈앞에서 본 건 처음이었거든요. 총소리인지도 몰랐을 정도로 현실 감각이 없었습니다. 저랑 친구는 서로 쳐다보며 이게 무슨 미친 상황인가 싶었는데, 연이어 탕 하는 소리가 울리더니 제 친구의 머리에서 붉은 피가 터져 나오며 그대로 쓰러져 버렸습니다.



그제야 알았죠. 아, 망했구나. 다행히 그 순간 제가 탱크 뒤편에 가려져 있었거든요. 정말 뒤도 안 돌아보고 탱크 뒤쪽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렸습니다. 한참을 달리다가 뒤를 돌아봤는데, 쥐죽은 듯이 고요하더군요. 어디까지 달려온 건지, 거기가 어딘지도 모를 곳이었습니다. 일단 숨죽인 채 사람들이 쫓아오는지 한참을 기다렸는데 아무도 오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왔던 길을 크게 우회해서 다시 정수장 입구 쪽으로 가봤죠. 그랬더니….”



랄프는 마지막 한 모금을 깊게 들이마시고는 꽁초를 바닥에 튕겨냈다.



“아무것도 없는 겁니다. 거대한 탱크로리며, 총에 맞은 제 친구랑 남자들까지. 말 그대로 싹 치워져 있었어요. 심지어 약품 탱크 밸브도 굳게 잠겨 있더군요. 순간 제가 미쳐서 몽유병으로 헛것을 본 건가 싶었어요. 활짝 열려있던 정수장 입구 문도 굳게 잠겨있었고요. 야밤에 문이 굳게 잠긴 정수장 앞에 저 혼자 덩그러니 남겨져 있었던 거죠.”



랄프는 힘이 다 빠진 듯 멍한 시선으로 바닥을 응시했다.



“그 길로 집에 어떻게 기어 들어왔는지도 모르게 쓰러져 잤습니다. 그렇게 며칠을 공포에 질려 꼼짝 않고 숨어 지냈는데, 밖에서 사람들의 끔찍한 비명 소리가 들리더군요. 뭔가 해서 창문을 열어봤더니… 하아. 세상이 이 지경이 되어있더라고요.”



헌터는 랄프에게 당시의 화학 공장 위치를 기억하냐고 물었다. 랄프는 어딘지 알고는 있지만, 광인 사태가 터지던 날 그 화학 공장이 의문의 폭발 사고로 날아갔다는 뉴스를 들었다고 답했다. 헌터는 드미트리를 잡기 위해 랄프가 결정적인 증인이 되어주어야 한다고 설득했지만, 랄프는 자신은 그저 시키는 대로 했을 뿐 더 이상 이 끔찍한 일에 관여하고 싶지 않다며 선을 그었다.



그때, 골든타워 전역의 모니터에 긴급 속보가 떴다. 화면 속에는 말끔한 정장 차림의 드미트리가 단상에 서 있었다.



[존경하는 시민 여러분. 골든타워 비서실장 드미트리입니다. 국가적인 재난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시민 여러분을 뵈오니, 관리자로서 마음이 무거우며 하루빨리 이 사태가 종식되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얼마 전, 저희 관리국으로 한 통의 결정적인 제보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그 내용인즉슨 이번 사태를 야기한 원인이 자연재해가 아닌 '인재(人災)'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입니다.]



화면이 전환되며, 얼마 전 헌터가 확보했던 정수장 CCTV 영상이 흘러나왔다.



[보시는 화면 속 인물들은 이번 사태의 끔찍한 용의자들로서, 정수장을 통해 감염의 원인인 변이 바이러스를 살포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 흉악한 테러범들은 자치군과의 몇 차례 교전 끝에 대부분 사살되었고, 신원 확인 결과 이들은 반정부 무장 세력인 「자유해방군」 소속인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화면 한구석에 자유해방군을 상징하는 로고가 큼지막하게 띄워졌다.



[자유해방군의 반인륜적이고 파렴치한 테러 행위는 도를 넘었으며, 선량한 우리 가족들이 그들의 극악무도한 테러리즘에 희생되었습니다. 정부는 이 끔찍한 진실에 분노를 금치 못하며, 모든 수단을 총동원해서라도 이번 테러에 가담한 자들의 뿌리를 뽑아낼 것입니다. 현재 자치 부대에서 잔당들의 행적을 맹추적 중이며, 사건 당시 가담자로 추정되는 인물 중 한 명이 아직 살아있다는 사실을 확인하여 이 시간부로 전국에 긴급 수배령을 내리는 바입니다.]



스크린 가득 랄프의 얼굴 사진이 대문짝만하게 나타났다.



[용의자는 5군에 거주하며 이전부터 자유해방군에 소속되어 반정부 활동을 일삼아 온 극렬 분자로 추정됩니다. 시민 여러분께서는 해당 인원의 인상착의와 비슷한 사람을 발견하신다면 지체 없이 자치군에 제보해 주시기를 당부드립니다. 끝으로 지금 이 순간에도 고통받고 계신 시민 여러분을 생각하며, 저희 시에서는 하루빨리 사태가 수습될 수 있도록 뼈를 깎는 노력을 다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뉴스를 지켜보던 랄프의 얼굴은 종잇장처럼 하얗게 질려버렸다.



“말도 안 돼! 난 자유해방군 따위가 아니라고! 이건 악랄한 모함이야!”



헌터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제퍼슨이 빅터 시장을 만난 직후, 빅터 측에서 꼬리를 자르기 위해 먼저 선수를 친 것이 분명했다. 랄프는 하루아침에 무르만스크를 생지옥으로 만든 희대의 테러범이 되었고, 이제 지부 내 그 어디에서도 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게 되었다.



“당장 경찰서로 가서 사실대로 말하겠어!”



흥분하여 날뛰는 랄프를 헌터가 제지했다. 헌터는 지금 상황에서 일개 용의자로 수배된 당신의 말을 믿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며 냉정한 현실을 일깨워주었다. 랄프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거친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사방이 막힌 벼랑 끝에서 그는 막막함에 절망했다.



헌터는 그에게 무르만스크는 이미 포위망이 좁혀져 위험하니 자신을 따라 헌터 본부로 피신할 것을 권유했다. 랄프는 한동안 넋이 나간 사람처럼 말이 없었다. 이내 떨리는 손으로 주머니를 뒤져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었다.



한참 동안 침묵 속에서 독한 연기만 뿜어내던 랄프가 마침내 결심을 굳힌 듯 비장한 눈빛으로 헌터 앞에 섰다.



“강변공원역 7번 출구. 수요일 아침에 그리로 와주십시오. 준비하고 있겠습니다.”



헌터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어둠이 짙게 깔린 골목 밖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